회고록

그시절 그추억...

번개맨 이충원 2018. 1. 9. 13:13


국민학교 5학년때 전등사 소풍가서 찍은 사진이다.



좌로부터 필자 ,김동호, 고도병..

나에 집은 성말내 꼭대기에 있어 강화면 시내가 다보였다.강화는 고려시대 임시수도 였다.그래서 4대문이 있고 성곽이 축조 되어 있다..그래서 성말내라는 지명이 생긴듯하다..우리집 바로밑에는 감시초가 있었다..집바로 옆에 국민학교가 있어 점심시간에는 집에와서 점심을 먹고 갔다..그당시 강화국민학교는 엄청큰 학교였다..학생수가 3천명이 넘었다..학생수가 많아 2부제 수업을 했다..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을 했다..가끔은 오전 오후가 햇갈려 등교하면 아무도 없었다.참으로 황당했다..오전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동무들과 모여 자치기 ,비석치기,구슬치기,딱지치기,숨박꼭질,수건돌리기등, 고무신으로 차를만들어 흙을 실어 나르고 그흙으로 두꺼비집을 만들며 놀았다..부자집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고 대부분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그래도 나는 읍내에 살아 촌놈소리는 안들었다.좀떨어진 국화리나 옥림리에 사는애들은 완전 촌놈이었다.책가방이 없어 책보자기에 책을 싸서 어깨에 메고 학교에 왔다..

저녁을 먹고 나면 운동장에 모여 운동을 했다.철봉과 링 평행봉등의 운동을 했다.한무리는 갑곳리 까지 왕복 마라톤을 했다.학교 운동장에서 갑곳리까지는 왕복 8km 정도 된다..항상 뒤쳐졌지만 달리는것이 좋았다..

아침이면 북산 넘어에서 들려오는 인민군 대남방송이 아침을 깨웠다..해병대 부대가 섬끝에 주둔하고 있었다..간첩이 넘어와 친척을 만나고 갔다는 소문은 자주 들었다..학교에가면 반공포스터가 많이 붙여 있었다..그때는 표어가  반공 반일 이었다..

밭가운데 집이있었고 주위로는 감나무가 있었다.가을에는 장준감이 익어 매미채로 따먹고 납작감은 너무 떫어 소금물에 우려먹었다..800평 정도되는 밭에는 겨울만 빼고 사철농사를 지었다.농사일은 모두 엄마가 했고 아버지는 손끝하나 손대지 않았다..누나들이 여럿 있었지만 엄마를 돕는것은 항상 내가 했다..닭장에는 항상 신선한 알이 있었다. 고기가 비싸고 귀한시절이라 명절때만 고기구경을 했다..명절때 돼지고기 한점 얻어먹으면 그다음날 설사로 화장실 가기 바빴다.그래도 좋았다.그래도 가끔은 생선구이를 먹을수 있었다.그시절 고기보다 생선은 엄청쌌다.요즘은 생선보다 고기가 싸지 안은가? 숯불에 꽁치 굽는 냄새를 아는가? 이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생선이 꽁치인줄 알았다..김은 들기름을 바르고 소금뿌려 구운후 각자에게 1장씩 엄마가 나눠준다..그렇지안으면 서로먹겠다고 싸움이난다.아침일찍 굴장사들이 지게에 굴을 싣고 동네를 돌아 다니며 팔았다..가무락(모시조개) 한개얻어 구멍을 내서 빨아먹는맛 이맛을 알아?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엄마 따라 시장에 갔다..나무 한지게 사고 (그당시 연료는 나무를 땠다) ,멍석에 삶은 꽃게를 판다..조르고 졸라 삶은 꽃게한마리 얻어먹는맛  기가막히다..식구가 많으니(9홉 식구) 한달에 쌀 한가마니가 모자랐다고 한다(어머니 말씀).옆에 사는 우순이 누나는 극장갈때 마다 나를 데리고 간다..이유는 따로 있었다..극장 갈때마다 남자를 만났고 나는 편지도 전해주고 충실한 심부름꾼이 었다..작은 누나는 공부를 잘해 인천 사범고등학교에 다녔다..19살에 졸업후 국민학교 선생이 되었다..큰누나는 중학교 졸업후 동생들을 위해 심도직물 공장에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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