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국민학교 시절.

번개맨 이충원 2018. 2. 1. 15:25


어려서 나에 별명은 맘보 였다..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불렀다..어른들이 한곡 불러봐~ 시키면 주저하지 안코 김삿갓 노래와 신라의 달밤을 불렀다..나에 18 번지 노래였다..뒷간에 가면 강화극장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가 흥겨웠다..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아래로~~이시절 이노래가 유행했나 보다..지금 찾아 보니 노래 제목이 청포도 사랑 이다..학교에 가면 점심시간에 우유와 옥수수빵을 먹을수 있었다..미국놈들의 무상원조로 준것이었다..일본놈도 나쁘지만 미국놈도 나쁜 개슥히들이지..DDT 분말약을 옷속으로 등뒤와 앞에 뿌려주곤 했지..그때는 이와석해 벼룩 빈대등이 엄청많았다.그많던 이가 언제 사라졌는지 알아? 연료가 전환 되면서부터야..나무만 때다가19공탄 무연탄을 때기 시작했지..이때가 1965년쯤 일걸..바로 그때부터 무연탄에서 나오는 독가스 때문에 이와 벼룩이 사라졌다고 해.. 더무서운것은 연탄가스에 중독되 죽는 사람도 많았지..지금은 DDT 사용금지 됬지..암을 유발한다고...학교를 증축한다고 미군들이 목재를 싣고와 기계톱으로 짜르는데 그렇게 굵고 긴나무는 처음 봤다..땅을 다진다고 밟고 다녔다.교실바닥이 나무로 되있었다. 청소가 긑나면 초를 칠해 광을내고 선생님한테 검사를 받은후에 집에 갈수 있었다..강화시내를 흐르는 개천에는 붕어와 메기가 참많았다..쪽대 하나만 가지고 나가면 반빠게스씩 고기를 잡았다..어른들은 게막을 짓고 밤에 호롱불을 밝혀 민물 참게를 잡았다..참게 게장은 먹어본 사람은 안다..완전 밥도둑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외할머니 집으로 놀러갔다.창후리 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서 3KM 쯤 걸어가야 했다..모든 도로는 비포장으로 차가달리면 먼지가 뽀얗게 날리고 차는 마구 흔들려 멀미가 심했다.그래도 외가집에 가면 좋았다..가난한 시골 소작인의 집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지 모른다.그래도 나는 장손이라고 외할머니가 귀여워 해주셨다..달걀찜도 해주시고 생달갈을 주면 점방에가지고 가서 사탕과 바꿔먹었다..시골은 돈이 귀하니 물물 교환이 많았다..쌀을 퍼주고 물건들을 샀다.동네 또래들이 읍에서 나왔다고 잘놀아 준다..개뻔당 (갯벌) 에나가면 이놈들이 잡아주는 새우를 걍 먹었다..짭조름하고 단맛이 난다.. 많이 잡아 할머니께 드리면 가마솟에 볶아서 주는데 소금을 너무 쳐서 엄청짰다..갯뻘에는 해나무도 많고 칠개, 망둥어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밤이면 호야불을 들고 칠게를 잡았다..칠게는 게장을 만들거나 복아 먹었다..한일주일 있다가 돌아오느길에 할머니는 찹쌀덕을 해주셨다..쌀이 귀한시절에 찰떡을 해주시다니 지금 생각하면 장손이라고 특별히 대접해준것 갔다..85세되던 겨울에 돌아 가셨다..

4학년땐가? 생각이 가물가물 하다..숙제를 안해왔다고 선생이 벌을 주는데 여자애들은 뒤에나가 무릎꿀고 손들어 벌을 주고 남자들은 빨개 벗겨 각반으로 조리돌리는 선생도 있었다.얼마나 창피한지 손으로 자지만 가리고 다녔다..지금같으면 상상도 할수없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당시는 누구하나 제지하는 사람도 신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지금생각하면 그선생새끼 변태아냐?ㅉㅉㅉ.요즘 얘기로는 성폭력인가? 잘모르겠다..

성말래 집에 살다가 동문안집으로 이사를 했다.이때가 6학년때다.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졸업식이 열리고  송사와 답사 시간에는 눈물바다가 됬다. 나는 공부를 잘해 우등상은 항상 받았다 .성적표에 모두 수수수수수 를 받았으니~~졸업식날 교육장 상을 받았다.선생들이 한턱내라고 하니 집으로 초대해서 떡꾹과 술을 대접했다..그당시 강화국민학교는 학생수가 3천명이 넘는 큰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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